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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더 씽(2011)

  감독 이름을 구구하게 적는 것보다는 이게 더 확실할 것 같아서 제작연도를 함께 달아둔다. 아! 〈윤희에게〉, 〈러브레터〉, 〈이터널 선샤인〉, 〈캐롤〉, 〈괴물(1982)〉과 더불어 눈 오면 떠오르는 영화 리스트에 등극되셨어요!

 

  존 카펜터의 원작을 몹시 재밌게 보았다. 한 선상에 놓이자니 욕먹는 구석도 있고 일반 관객이 보기보다는 더 칭송받는 측면도 있는 그런 영화. 어쨌건 팬걸이라면 눈물 흘리며 볼 수밖에 없다. (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벅차오르는 가슴을 도무지 어찌할 줄 몰라 반쯤 울었다) 

 

 먼저 82년 작에 비해 눈에 띄게 인상적인 부분들. 이 카테고리에 적히는 모든 글이 그러하지만  당연히도 스포일러가 있다. 

 

(1) 여성 캐릭터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82년작과 달리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고, 사실 상 거의 여주원톱물로 분류하여도 무방할 정도의 분량과 활약. 특히 이 '원톱 주인공 체제'라는 점에서 82년작과 스토리의 궤를 완전히 달리하게 되는 부분이 생기는 게 흥미로운데 후술 할 예정. 

철저하게 남성 중심(…라기보단 주변부에 여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완고한 배제… 도 난 나름 괜찮았다. 어지간한 공포영화들이 여성 캐릭터의 사망/변이 장면을 훨씬 포르노그래피적으로 처리하거나 집요하게 그려내는데, 82년작은 그저 남성 캐릭터들만 처참하게 죽어난다는 점이 재밌었거든.)적인 82년작과는 이 점부터가 아주 다르다. 원작을 훼손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리메이크나 후속작이 아니라 프리퀄을 만들었으면서도, 편향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제작되는 시간대(2010년대)에 맞게끔 강인하고 책임감 강한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너무나도 호감이었다.

 

(1)-1 그리고 이러한―전형적인 주인공 타입의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덕에 82년작과는 결이 확연히 달라진다. 우선 83년작에서, 관객들은 주인공 '맥크리디'를 결코 신용할 수 없다. 그는 전형적으로 선한 인물도 아닐뿐더러, 외려 성질이 좀 괴팍한 측면도 있고 심지어 어떤 장면들에서는 의도적으로 그의 행적을 삭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필연적으로 의심하게끔 만든다. 누구도 맥크리디를 믿지 않고 심지어는 맥크리디 역시 누구도 믿지 못한다! 눈발을 뚫고 돌아온 맥크리디는 정말 인간일까? 아니면 '그것'일까? 심지어는 추후의 전개를 통해 맥크리디가 인간임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에게 관객이 믿고 의지할만한, 서사의 길라잡이 역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82년작에는 인력을 가진 안내자가 없다. 관객은 마치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그 극지에 던져진 채 의심하고 의심할 뿐이다. 신용 불가능한-냉소적인 주인공―83년작 전체가 얼음판 위를 걷는 듯 싸늘하고 비관적인 톤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이 맥크리디라는 인물 덕이 무척 크다.

 

 그렇다면 11년작 속 '케이트'는 어떨까? 케이트는 앞서 말했듯 강인하고 책임감 강한 연구자이며, 분명하게도 정의롭고 용감하다. 대의를 생각할 줄 알 뿐더러 쉽사리 카메라 바깥으로 나가는 일 없다. 케이트는 전통적인 1인칭 안내자다. 관객은 케이트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며 그 손과 다리로 움직인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전적으로 케이트를 믿을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야 그는 정의로운 인물이고 한시도 곁을 비우는 일 없으니까! 게다가 이 담대한 인물 곁에 있는 인물들은 당연히 마음이 기울기 마련, 완전히 파편화 되었던 82년작과 달리 케이트를 지지하고 함께 활동하는 조력자들도 생긴다. 그렇기에 아주 아주 씨니컬했던 83년작과 달리 11년작은 필연적으로 어떠한 온정이나 전형성을 띨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정의로운 인물이 역겨운 외계 생명체로부터 맞서 싸우며 인류를 지키려는 행동에서 견고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케이트를 의심할 일은 (결단코) 없으므로 맥크리디가 주인공인 경우와 다르게 불신에 의한 긴장감은 감소한다.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에는 이 요소 역시 크게 작용하고 있으리라. 특히나 〈괴물〉은 그야말로 '불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아니, 아군 안에 적이 있는. 그러니까 그 경계는 아예 모호해지는 그 팽팽한 불안과 의심의 감정이 〈괴물〉을 비롯한 모든 바디 스내처물의 주된 원동력임을 고려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1)-2 그러니까, 이 멋진 인물 케이트는 82년작의 팬에게 어느 정도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타고났단 것이다. 다행히 제작진도 아주 바보는 아닌지라, 이러한 원톱 주인공 체제가 영화의 텐션을 어느 정도 깎아 먹으리라는 걸 분명히 인지했던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11년작이 새로 덧붙인 몇몇 상황 설정 덕이다.

 

 첫 번째 상황 설정: 케이트는 의뢰를 받고 꼬박 며칠 전에 미국에서부터 이 기지로 날아왔다. 기지 사람들과 초면인 상태로, 여건 상 남초이기도 한 탓에 이 곳이 다소 어색하고 불편하다. 이미 기지로 발령받아 오랫동안 아웅다웅 함께 지내온―또 개중에는 아주 절친한 사이도 있는 82년작의 인물들과는 다르다. 맥크리디가 컴퓨터로 체스를 두며 노는 둥 일상적인 루틴을 소화하던 것과 달리 케이트는 그냥… 기지의 모든 게 낯설다. 케이트가 관객과 아주 가까운 덕에, 관객 역시 케이트가 느끼는 이 어색한 거리감을 그대로 흡습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로소 나타나기 전, 영화의 초반부는 이 서먹한 공백으로 긴장감을 채워준다.

 

 두 번째 상황 설정: 노르웨이 남극 기지의 인물들은 두 갈래로 나뉜다. 미국인이거나, 노르웨이인이거나. 82년작의 인물들이 모두 미국 국적이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편 가르기 딱 좋은 이 국적 구성은 실제로 작품 중반에 요긴하게 쓰인다. 미국인들 말을 믿을 셈이냐느니, 하는 현혹으로.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어떤 상황에서는 굳이 노르웨이어를 쓴다. (이 영화에서 영어를 전혀 쓰지 못하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고 그 인물은 후에 아주 요긴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미국인인 케이트(며 대다수 관객들)는 환장할 노릇이다. 인간이냐, '그것'이냐. 미국인이냐, 노르웨이인이냐. 미국 기지에서 동고동락하는 직장 동료들과는 처한 상황이 다소 다르다. 

 

 세 번째 상황 설정: 혈액 검사를 통해 인간과 '그것'을 완전히 구분할 수 있던 82년작의 대원들과 달리 이들에게는 그럴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분간을 하느냐면, '그것'이 무기체는 복제해낼 수 없단 점에서 착안해 치아 교정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손전등으로 확인한다. 당연히도, 별도의 치과 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실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이 검사를 통과할 수 없다. '그것'이 아닌데 이가 깨끗하다는 이유만으로 열외 된 인간들은 미칠 노릇이고 실제로 반발도 한다. 이 허술한 주먹구구식 검사 덕에 결국 인간들끼리도 싸우고 의심한다!

 

 이렇게 영화는 의로운 원톱 주인공을 내세운 대신, 긴장감의 빈 부분들을 이 새로운 설정들로 메워본다. 이와 더불어 아주 정통 호러스러운 연출을 중간 중간 집어넣음으로써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는데, 나로서는 이 모든 게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느껴진다. 이미 서사의 곳곳을 두고 82년작의 자가 복제라고 따지는 인간들에게 맥크리디 계열의 냉소적인 주인공을 들이밀었다면… 그냥 완벽한 카피라고 거품 물고 늘어졌을 것 같거든. 유사성을 적절하게 피해 가면서도 새 볼거리를 찾아 넣은 느낌이랄까. 난 참 좋았다.

 

(2) CGI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더미 등을 이용하는 등 100% 수작업으로 제작된 82년작과 달리 거의 100% CG다. 실제로는 애니메트로닉스를 제작해 촬영했다는데, 부자연스럽다고 판단했는지 편집 과정에서 전부 CG를 입혔다고. BTS 영상을 찾아보면 애니메트로닉스들의 엄청난 퀄리티와 점액을 하나하나 채우는 제작진의 모습에 어쩐지 거대한 인류애를 느끼게 된다. (내가 82년작을 걸작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는 그 시절에 수작업으로 이 대단한 영화를 만들어냈단 사유 덕이 크다) 아무튼 CG 입힌 것은 아쉽게 되었지만, 82년 당대의 기술이었다면 재현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 부분들을 창조해낸 점이 좋았다. 특히 에드바드와 아담이 융합하는 장면은 11년작의 가장 근사한 포인트. 융합된 버전의 애니메트로닉스가 있긴 했는데, 합쳐지는 과정을 CG 없이 어떻게 표현해냈을는지는 불명이다. 정말로 CG가 있어서 가능했던 대목이고, 그 덕에 반짝반짝(…그런 장면에 이런 수식을 붙여도 될는지는 모르겠다만) 빛나던 명장면. 아주 역겹고 좋았다!

 

(3) 전술했지만 영화가 어느 정도의 온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캐릭터에게도 애정을 일정 수준으로 품게 될 수밖에 없던 구조.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또 없지만 '라스'와 케이트의 조합을 아주 사랑하게 되었다. 특히 라스는………… 그냥 마구마구 하염없이 미쳐버려요

 

그리고 또 82년작에 비해 다소간 아쉬웠던 부분들.

 

(1) 눈에 띄는 설정 충돌들: 사실 이건 오타쿠 아닌 이상 눈에 잘 안 띈다. 유튜브에서 삭제씬 찾아보다가 놀랐던 부분 하나―모 대원을 괴물이 복제하는 중에 의류를 카피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괴물이 무기물은 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설정이기 때문에 이런 걸 찍어뒀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편집 전에는 그게 설정 오류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는 거지?

(2) 괴물이 좀 덜 위협적이다. 그래서 82년작에 비해 덜 무섭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음의 위기에 놓인 괴물들이 끝내 미국 기지로 가서 더는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죽여버렸나 보다' 라고 스스로 납득했다.

(3) 우주선 쪽 설정은 내겐 약간 투머치. 오히려 상상의 진척을 가로막아버렸달까. 그치만 규모가 주는 위압감도 상당하고, 82년작보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넣긴 넣었어야 할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는 상당히 만족하면서 본 영화. 엔터테이닝 요소는 이 쪽이 더 강한 것 같아(아무래도 82년작은 옛날 영화이기도 해서 요즘 헐리웃 영화와 같은 선상에 놓자면 다소 잔잔한 부분이 있다) 내 여자친구들은 11년작을 보다 선호하지 않을까, 싶기도. 이런 영화 많이 많이 많이들 만들어주면 좋겠다!

 

 

덧. 추천하는 감상 순서: 괴물(1982) → 더 씽(2011) → 괴물(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