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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그게 사랑이었어 / 허지웅

그게 사랑이었어

 

 

 몇 년이 흘러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가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어느 괴로운 밤 무작정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파트 앞의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저께 꾸었던 꿈을 계속 생각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내게 장을 봐 오라며 쪽지에 이것저것 살 것을 적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도중에 쪽지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헤어졌다는 걸 생각해냈다. 쪽지를 잃어버린 것이 너무 서러워서 나는 펑펑 울었다. 그러다 깼는데 그녀가 옆에 있었다. 네가 쪽지를 적어 주었는데 내가 그걸 잃어버렸고 우리는 헤어졌다고 말하면서 품에 안겼다. 바보, 그럴 리가 없잖아, 라면서 그녀가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서 깨어났다. 모두 다 꿈이었다. 나는 쪽지를 잃어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 가슴을 쥐어짰다.

 다섯 시간쯤 지났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트로 올라오는 언덕 끝자락으로 불빛이 퍼지더니 택시가 나타났다. 그녀가 택시에서 내렸다. 화장을 짙게 해서 다른 사람 같았다. “나보다 널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아니, 있어.” 우리는 몇 마디를 더 나누었고 헤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카테고리를 어디로 해두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은 이 쪽으로. 허지웅의 글은 겉멋이 없어서 좋다. 그렇다고 또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담백한 허세랄까 감당 가능한 서정이랄까. 적확한 선을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줘서 언제 읽어도 참 좋다. 라디오 멘트도 좋고 sns에 짧게 쓰는 글도 좋지만, 아마도 영원불멸할 최애―그야말로 압권인 글은 바로 이것. 원래도 연인간의 씁쓰름한 회한에 대한 글을 참 좋아하는데 본인 이야기를 참 잘 그려냈다 싶다. 읽고 또 읽고 곱씹고 또 곱씹어도 좋은 근사한 수필.

 

 많은 이들이 직관적인 글은 덜 유려하다고 착각하는데, 말도 안 되는 수식 가득 갖다댄 글보다 이 분명한 글이 훨씬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사는 모양이다. 나도 이런 타입의 문체를 참 동경하는지라 재미나게 읽는데, 공교롭게도 남성 에세이스트가 많구나. 까닭이 있을까? 여하간, 이 흐리고 꿉꿉한 날씨에 읽기에 징그러울 정도로 좋은 글이네. 생각날 때마다 이렇게 늘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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