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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핑크와 취향의 상관관계

이미 너무나도 많이 발화된 사안이지만, 온전한 내 언어로 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핑크, 지독하게 흔하고 익숙하고 내 삶을 정리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색채. 때문에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선 어린 날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핑크와 여성, 하면 떠오르는 모든 클리셰대로 성장했다. 어릴 땐 '핑크 공주'였다가 사춘기 즈음을 전후로 핑크를 증오하고 기피했다가, 지금은 핑크를 좋아한다는 걸 긍정하고 애정을 표하고 있다. 핑크에 함의된 짙은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가, 전면적으로 거부했다가, 객관적 시각을 얻게 되며 다시 나의 선호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최근 <엔드 게임> 개봉으로 이래저래 조금 시끄러운데(그렇지만 <미성년> 보세요), 내가 MCU를 비롯한 히어로 무비와 남성 일색의 창작물들을 즐겼던 시기가 핑크를 증오했던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 세 살, 내 옷장은 별다른 무늬나 장식이랄 게 없는 검고 어두운 옷감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실 이건 강요되는 '여성성'에 대한 (자각하지 못한) 거부 의지 외에도 비만 여아로서 그야말로 바닥을 기어야만 했던 내 자존감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일단 여기에선 각설한다. 남색 후드티와 검은색 맨투맨을 돌려 입으며 뚱한 표정을 짓던 나는 그 전까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한없이 부끄러워 했다. 디즈니 프린세스를, 분홍색을, 긴 머리와 그것들에 엮일 헤어밴드와 핀 따위를, '오빠' 같은 호칭을,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며 또 응당 그래야 하는' 모든 것들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후드티 주머니 안에 꽉 쥔 주먹을 집어넣고 혼자 속으로 그것들을 헐뜯었던 것이다. 나는 자주 부끄러웠고, 내가 전술한 것들에 아무 관심도 없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여자아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만 같다는 기분에 시달렸다.


 그땐 MCU가 막 날개를 달던 무렵이었다는 것을 행운이라고 적어야 할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난 DC와 마블을 번갈아 가며 사랑하기 시작했는데, MCU의 구세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은 내게 놀랍도록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의 난 지금보다도 더 '중년남'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눈 앞에 딱 나타난, 메카닉한 디자인의 수트를 입은 중년남 히어로라니? 당연한 수순처럼 깊이 사랑에 빠졌다. 헐크와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와 기타 등등 이젠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남성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었고 코믹스의 거의 모든 이슈를 체크했다. 아이언맨은 정말 좋아했다, 정말로. 봉제인형들 사이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아이언맨 인형을 껴 넣었고 모든 설정을 줄줄 읊을 수 있었다. 남색 후드티의 시기, 새빨간 수트를 입은 아이언맨은 내게 과할 정도로 큰 의미였다.


 사실 난 아이언맨에 빠지기 이전까지 히어로 영화를 좋아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단언하고는 했는데,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혼을 갈아서 좋아했다. 아무튼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하다가, 대략 15년도를 기점으로 하여 관심을 뚝 끊었다. 그때 쯤에 하늘색 철제 필통을 버리고 다른 걸로 바꿨다. 해지도록 입던 남색 후드티도 버렸다. 너무 닳고 닳아서 도저히 쓸 수가 없었는데, 사실 그걸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건 역시 내 마음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아이언맨 3>는 극장에서 본 내 마지막 MCU 영화가 되었다가, 최근에 <캡틴마블>을 보면서 그 기록이 깨졌다. 2019년의 난 분홍색 필통을 가지고 다니고 베이지색 후드티와 핑크색 후드티를 자주 입는다. 아이언맨엔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여성성'을 부끄러워 했던 내가 이제 여성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분홍색을 좋아한다는 걸 숨기지 않고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서 지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유사연애까지 하는 영화를 혐오하며 그냥 한없이 조용하거나 여성들이 많이 나오는 창작물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디즈니 프린세스도 좋아한다. 3D는 디즈니 프린세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하여튼. 핑크를 꺼렸던 몇 년의 시간은 내가 나를 꺼리던 시간 같고, 그것들은 또 MCU를 사랑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핑크를 좋아하는 나는 핑크를 싫어하던 시기의 나처럼 나를 죽일 듯이 미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분홍색을 좋아하고 노란색을 좋아하고 베이지색과 코코아색과 녹색과 보라색을, 거기에 흰색과 회색을 조금씩 섞은 색들을 좋아한다. 남색 옷은 한 벌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양한 색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어서, 취향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핑크를 다시 바라보게 되면서 내 생애는 한 차례 더 바뀐 셈이다. 핑크 이야기를 좀 더 잘… 써보고 싶었는데 피로에 절은 새벽의 뇌로는 영 무리인 듯싶다. 그냥, 이 얘기를 어디 남겨두고 싶었다. 그리고 백인 남자 히어로들은 정말 증오하지만 <캡틴 마블>은 아주 재밌답니다. 캡틴 마블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