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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부탁 하나만 들어줘 / 폴 페이그


" 높은 놈들에게는 강하게 나가야 돼, 그래야 우습게 보지 않거든. "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밌게 본 영화. 폴 페이그의 여성 캐릭터는 언제나 성공적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한다. 폴 페이그 작 중 가장 내 취향(소품과 의상에 공을 들이고 서스펜스가 극 전체를 끌고 나가며 아기자기한 감이 있는 동시에 레즈비언 요소가 존재하는 것)과 가깝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취향과는 맞물렸지만 작품성만 두고 보자면 군데군데 아쉬운 지점들이 자주 눈에 띈다. 훨씬 재밌게 세공할 수 있었을 서사가 엉성하게 엮여 큰 임팩트를 내지 못하는 게 아쉽다. 가장 크게는 브이로그 부분. <서치>에 버금갈 수준으로 신선하게 연출해낼 수 있던 요소인데(특히 채팅창!) 영 제대로 활용하질 못했다.


 영화를 보기 이전에 난 '스테파니'와 '에밀리'가 미혼의 2030 여성들이며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을 거라고 얼핏 예측하고 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친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기혼 유자녀 여성에 두 인물의 연결고리도 자녀 친구의 학부모,라는 점에 놀랐다. 에밀리의 동기와 목적의 끝이 자녀에게 있다는 것, 너무 자주 서술된 기혼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 등에 처음엔 조금 실망했던 것도 없잖아 있는데, 되돌아보면 폴 페이그의 영화 중 기혼 유자녀 여성을 완전한 주연으로 내보낸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혼자 사는 게 너무 재밌는 여성이 있다면, 피붙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여성도 있는 법이니까.


 원작은 한국에 정발되지 않아서, 인터넷에 원작 내용을 검색했는데 그쪽 엔딩(영화랑 전혀 다르다)도 나쁘지 않은 듯 하다. <나를 찾아줘(Gone Girl)>와 결이 많이 비슷한 느낌. 원작 레퍼런스를 많이 따와서 진행했어도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블레이크 라이블리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하고, 에밀리의 수트 스타일링은 박수만 나온다. 평소 안나 켄드릭은 정말 좋아하지만 <가십걸> 때부터 블레이크에 큰 관심을 둔 적 없던 사람인데, 이 영화는 블레이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배우의 힘과 이미지가 작품 전체에 크게 작용한다. 배우 둘이랑 캐릭터가 참 잘 어울려서 그것도 재밌었다. 본체들 인터뷰도 너무 귀여운.


 에밀리랑 에이미랑 만나면 진짜 재밌을 텐데… 혼자 또 크오 주워 먹는 중.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를 견디지 못해서 결국엔 싫어할 것도 같고. 아, 에밀리가 스테파니에게 미안해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좋았다. 미안하다는 소리 밥 먹듯이 하는 타입이라 위에 인용한 대사며 에밀리가 스테파니에게 하는 모든 조언들이 가슴에 콱콱 박혔음. 진짜 블레이크 라이블리 없었으면 영화 어떻게 만들려고 했지?


 그래도 여성 주연의 영화를 이토록 꾸준히, 안심을 넘어 기대하며 볼 수 있게 해주는 감독은 정말 귀하고, 빨리 차기작이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