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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11월은 (다시) 회한의 달

 

1 생각을 좀 정리하려면 글을 써야겠다. 일단 오늘이 수요일이니, 월요일에 일어난 일부터.

 

2 월요일은 운수가 좀 나빴다. 사실 크게 나쁜 일은 없었는데도 괜히 그렇게 느껴졌다. 아침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갈 계획이었는데 9시 10분에 눈을 떴고, (9시 30분 수업이 있던 날이다) 그래도 급하게 씻느냐고 10분 정도 지각을 했다. 전날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친구가 좀 웃어서 속이 상했다. 오후 수업을 함께 듣던 친구들이 모두 수업에 빠져 가장 까다로운 수업을 독강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좀 심통이 났다. 


3 그러다 갑자기 초대를 받고 선생님을 뵈러 갔다. 내 사랑 선생님! 신입생 때 처음 만난 뒤로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신 분. 대략 세 시간 정도 선생님 연구실에 다른 분들과 앉아서 세미나를 들었다. 어딘가에 둘러앉아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어서, 많이 신이 났다. 이야기하면서 밥도 먹어서 더 신이 났다. 재미있는 분들이 많았고 새 지식들이 콸콸 들어오니 아주 기분이 좋았다. 말미에는 선생님께서 당신이 몇 해 전에 쓰신 책을 한 권씩 선물해주셨다. 시간이 늦어 급히 나오느라 싸인도 못 받았는데, 다음 번에 찾아뵐 때 꼭 청해야지. 그래서 월요일은 마음이 살짝 가뿐했다. 과식을 하는 바람에 배는 그렇지 못했지만서도… 원래는 오후 수업이 끝난 후에 바로 귀가해 하려던 일도 하고, 좀 쉬려고 했는데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왔다. 즐겁긴 했는데 에너지 소모가 심해서 살짝 울고 싶지만, 또 웃음이 나오는 기묘한 경험.


4 화요일, 오전에는 심리 검사를 받았다. 총 4종을 실시한 것 같은데, 결과는 다음 주에 나온댄다. 몇몇 문항들이 내겐 좀 힘겨웠다. 괜히 아닌 척 외면한 문항들도 있었고 괜히 과잉된 긍정을 표한 문항들도 있었다. 후에 받을 해설 상담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모르겠어서 걱정된다. 아무도 모르지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냐는 문항이 있었다. 나는 그렇다, 고 했고 가슴이 쓰렸다. 


4-1 이런 것들을 하게 되면 부러 묻어두고 살았던 옛 기억의 상자를 활짝 열어 이것저것 만지고 쓸고, 더듬고 정리하게 돼서 참 싫다. 그런 생각들로 마음이 부글부글, 너무 좋지 않아서 이후에는 그런 내용의 시를 썼다. 문집 마감이 수요일이라고 해서, 원래 거기에 실을 예정이었는데 오후에 물어보니 내가 연락이 없어서 이미 인쇄소에 넘겼다길래 당황했다. 아니, 이번 수요일까지라고 했잖아요! 급하긴 했다만 마음을 갈아 새로 써온 네 편의 시와 창고를 뒤져 찾아온 세 편의 시가 무용지물이 된 기분이라 서글펐다. 거기가 아니면 딱히 실을 데도 없는데. 


5 월요일에 뵀던 분이 저녁에 행사가 있다고 홍보를 해주셔서 찾아갔다. 식사를 해결하고 가시라고 홍보하셨기에, 정말 그러려는 생각으로 갔던 건데 예상보다 포럼이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와 집중하며 들었다. 질의응답 시간엔 질문까지 했고, 자율 배식이던 피자도 아마 행사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 많이 먹은 것 같다. 경품 추첨 때엔 당첨까지 됐다. 와, 정말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렸다. 끝나고 나가려는데 홍보해주셨던 분이 다가오셔서 보고 와주신 거냐고 했다. 왠지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서 이래저래 사담을 나누었다. 즐거웠다.

 아, 그리고 포럼 전에 대여해둔 세미나실 열쇠를 받으러 갔는데 일정 시간(내 대여 시간보다 2시간 빠른 시점) 이후에 왔기 때문에 예약 건은 자동 취소됐고 이미 다른 팀이 빌려갔다는 답을 들었다. 팔짱을 떡 낀 채로 응대하는데 왜 그리도 기분이 더럽던지, 난 원래 내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긴 하지만 화가 좀 났다. 홈페이지에 수령 시간 공지 및 자동 취소 건에 관한 공지가 명확히 올라와 있지 않았던 게 화를 더 돋은 것 같다. 학교 측의 어눌한 공지며 멍청한 애 보는 듯했던 직원의 응대며 괜히 헛걸음을 한 것까지 다 너무 화가 났다. 악! 아무튼 텁텁한 마음으로 포럼을 들으러 갔다가 기분이 많이 풀려서 나왔다.


6 그리고 그냥 다른 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새벽 2시까지 친구와 과제를 달렸다. 친구가 잡은 소재가 재밌어서, 여러모로 내 창작욕을 자극해서(!) 옆에서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많이 주었는데 친구가 참 고마워했다. 그리고 나는 너무 괴로워서 마음속으로 살짝 울면서도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했다. 다 끝내고 나니까 해방감이 최고였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고치면 고칠수록 끔찍해졌지만 그래도 끝냈다는 사실이 좋았다. (완전히 끝낸 건 아니고 월요일에 또 제출해야 하지만) 끝낸 뒤에 친구랑 막 끌어안으며 기쁨도 나눴다. 그날 밤은 나름 후련하게 잤다. 


7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월경이 시작됐다. 바깥엔 비도 오고 있었고. 그다지 서두르지 않으며 제 시간에 도착해 수업을 들었다. 끝난 뒤에 친구와 함께 학식을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친구가 좀 늦는 바람에 혼자 먹었다. 그리고 중간에 잠시 별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각설하고, 대망의 과제 제출 시간. 나부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반응이 정말 나빴다. 그리고 선생님의 요구에 의해 지난 한달동안 쌓아왔던 서사를 다 엎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자고 하셨다. 


7-1 선생님이 원래 번복이 심한 분이긴 하지만, 내 제출물은 거의 완성에 가까웠던 터라 친구들은 왜 하랬다 말랬다 하느냐며 내게 주어진 처분에 상당히 어이없어했지만 나는 화가 난다거나 짜증이 솟는다거나 기가 차거나 하지는 않았고 많이 착잡했다. 난 누군가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경우, 더 거세게는 누군가를 실망시킨 경우 나 자신이 정말 싫어진다. 그런 때엔 내가 무가치한 인간 같고, 속상하고, 깊은 땅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선생님이 바라던 걸 해결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정말 속이 상했다.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거나, 선생님의 기존 요구에 따라 작성했던 걸 좋아한 건 결코 아니지만, 오히려 쓰면서도 괴롭고 내내 꺼렸지만,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7-2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스트레스도 심했지만 착잡한 감정이 더 컸던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조금 울까, 싶었는데 일일이 우는 것도 같잖아서 참았다. 나는 왜 이런 일로 괴로워하지? 스스로에게도 계속 서글퍼졌다. 15년에 <사도>를 극장에서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는데, 영조와 사도세자의 알력이 빚어낸 비극이라느니 출연진의 연기력이라느니 그런 게 심금을 울린 게 아니었다. 나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책망하면서, 그에게 노골적인 실망을 표시하는 장면들이 무섭도록 아팠다. 좌석에 앉아서 소리를 죽이고 어깨를 떨면서 펑펑 울었다. 그땐 그걸 트리거가 눌렸다고는 생각 안 하고 그냥 사도가 너무 불쌍해서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내 트리거는 너무나도 명확하게도 그것일 것이다. 나보다 손위의 사람(특히 남성)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해, 그를 실망케 하고 그는 또 나를 책망하며 몰아세우는 일. 나는 그게 너무나도 두렵고 싫다. 싫다. 


7-3 하지만 또다른 친구가 이래저래 발상의 전환을 꿰해준 덕에(그 교수를 꺾은 사람은 너뿐이다! 같은 식으로 말해줬다) 기분이 그나마 풀렸고, 지금은 상념들을 좀 정리해보려 이 글을 쓰는 중. 정말 구구절절 주먹구구식의 이상한 글이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남들 보라고 쓰는 게 아니라 자가치유용(?)으로 작성하는 거니, 상관없다. 이제 할 일을 하러 가야지. 계속 비가 왔으면 좋겠다.